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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카트> 리뷰, 줄거리, 감상평 본문

오랜만에 연락 한 친구는 두 달 전 직장을 옮겼다고 했다. 대우가 더 나은 곳이냐고 물었지만 그냥 그렇다는 대답뿐이었다. 이 친구는 나와 달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는 대학이 아닌 회사에 들어갔다. 집안 경제 사정 상 친구의 어머니가 학비를 대줄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친구는 이것이 벌써 몇 번째 겪는 이직이었고, 항상 ‘비정규직’이라는 네임택을 목에 걸고 다녔으며, 단 한 번도 그것이 달가웠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니 그만둘 수는 없었고, 당장의 생활을 걱정해야 할 팔자에 정규직 입사를 준비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2014년 개봉한 영화 <카트>는 생각보다 가까운 영화였다. 비정규직 문제에 관한 얘기이기도 하고, 내 친구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 사는 일, 다시 말해 ‘먹고살자고 하는 일’에 관한 것이다. 그동안 노동 문제를 다룬 영화는 여럿 있었지만, 대게 독립 영화로 제작되어 조그맣게 상영을 하거나, 그마저도 상영관을 찾지 못해 사람들에게 보여질 기회가 없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카트>는 상업영화 최초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를 담았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영화는 81만 명이 넘는 누적 관객 수를 기록하며 상영을 끝마쳤다. 부지영 감독은 “특정한 주의나 주장을 전달하는 영화가 아니라, 사람들의 절박하고 아픈 현실을 정직하고 리얼하게 묘사하고 싶었다”며 제작 의도를 밝혔다.
<카트>는 2007년 일어났던 이랜드의 홈에버 사태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이랜드는 한국까르푸를 인수해 홈에버를 운영하며 까르푸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까르푸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계산원을 파견용역형태로 고용하였는데, 이랜드는 이러한 고용관습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카트>는 이랜드가 본사 캐셔들을 해고하고 모두 파견근무로 전환하면서 시작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반으로 한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500여 명의 노동자들은 6월 30일 상암동에 위치한 홈에버 월드컵 점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파업은 512일 동안 계속되었으며, 2008년 11월 13일에야 파업이 종결되었다.
l 비정규직의 정의와 종류, 그들이 받는 차별
비정규직에 대한 정의는 국가마다 매우 다른데, 우리나라에서는 2002년 노사정위원회가 고용형태를 가지고 한시적 혹은 기간제 근로자, 시간제 근로자, 비전형 근로자를 가리켜 비정규직으로 정의한 것을 따르고 있다. 여기에는 하청업체를 통해 노동자를 고용하는 간접고용, 일당을 받는 형태의 일용직, 개별사업자로 회사와 계약을 맺는 특수고용, 고용기간을 정해놓고 계약을 맺는 계약직 등이 포함된다. 2014년 3월 기준, 우리나라의 비정규직 임금근로자는 600만 명에 달한다. 전체 근로자의 32%가 넘는 수치다. 그러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부소장의 분석 결과, 비정규직의 시간당 임금은 정규직의 52.7%에 불과하지만 주당 노동시간은 50.5시간으로 정규직의 47.1시간보다 오히려 길다. 사회보험 가입률은 비정규직 형태별로 22∼25%에 불과하고, 상여금, 퇴직금, 시간 외 수당, 유급휴가·연월차 적용률은 16∼23%에 그친다.
l 영화를 통해 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실태
이들이 받는 차별은 수치에 지나지 않는다. <카트>는 이를 좀 더 다가가기 쉬운 모습을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영화는 개점 준비 중인 마트의 모습으로 시작하는데, 마트 대표를 중심으로 정규직 직원들과 계약직 직원들을 대치시킨 구도는 이 두 집단의 이질성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여사님’이라 불리는 이 영화의 주인공들, 즉 계산원과 청소노동자로 대표되는 계약직 지원들은 수당도 지급되지 않는 추가 근무를 강요받았고, 그들의 변변치 않은 휴식처는 보일러실 옆에 냉난방 시설도 없이 마련되었다. 사용자들은 직원들의 립스틱 색깔까지 지정해 주었다. 그러나 악조건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일을 다 하던 직원들에게 내려진 처사는 해고였다. 고용 형태를 아웃소싱으로 일괄 전환한다는 사용자 측의 일방적인 통보였다. 계약 기간은 5달이나 남은 상태였고, 정규직 전환의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이 부당해고에 대응하기 위해 계약직원들은 혜미와 선희, 순례여사를 대표로 하는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모두들 노동자의 권리 보장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으나, 억울함에 대한 호소와 생존의 문제에 더 이상 참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목소리를 냈다. 선희의 말처럼, “우리가 원하는 건 대단한 게 아니에요, 우리는 사람 취급 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나 사측은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다며 무시로 일관했고, 제대로 된 협상 한번 할 수 없었다. 계속되는 사측의 회피로 이들은 파업과 점거를 강행했지만 이들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불법’이라는 딱지와 무력 진압뿐이었다. 파업 중이라 비어있던 그들의 자리를 아르바이트 생으로 대체하려 하기도 했다(파업 중 대체 인력 사용은 불법이다). 사측은 그들은 언제든 다른 인력으로 갈아치울 수 있는 가벼운 존재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바위처럼 쉽게 움직일 줄 몰랐다.
l ‘반찬값’ 아닌 ‘생활비’ 벌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
그들이 긴 투쟁에 들어설 수밖에 없던 이유는 ‘더 마트’의 계약직 자리가 자기 생활의 버팀목이 되어줄 밥줄이었기 때문이다. ‘뜨신 방바닥에 누워 자는’ 사용자 측에서는 그들이 그저 ‘반찬 값이나 벌러 나온 여사님들’에 불과해 보일 진 모르겠지만, 선희 말처럼 그들 대부분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나선 사람들이었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얘기에 하나하나 귀를 기울이고 있자면, 이들은 단지 비정규직이라는 범주에만 포함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이 ‘여사님’들은 호칭에서부터 그렇듯 대부분 여성들이다. 순례여사는 영화 속 병원 씬에서도 가족이 등장하지 않는 걸로 보아 자식들의 도움 없이 홀로 사는 노인이고, 선희는 두 명의 아이와 남편이 있지만 일하러 간 남편과 자신의 월급을 합쳐도 아들의 수학여행비를 마련하기 힘든 상황이다. 선희는 이혼 후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는 한부모가정의 가장이고, 미진은 대학 졸업 후 50번의 면접을 봤지만 자신을 받아주는 곳은 마트 계약직뿐이었다. 그리고 저마다의 사정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경제력에서도 권력에서도 열세에 처한 사람들이었고, 때문에 열악한 근무환경에도 이 일자리를 포기할 수 없었다. 당장 먹고살 일이 급한 이들에게 계약기간도 적히지 않은 백지계약서는 문젯거리도 아닐 일이었다.
l 남의 문제가 아닐 일
‘여사님’들의 고충에 공감하는 이가 있었다. 인사부 소속의 강동준 대리는 평소 선례를 비롯한 비정규직 직원들과도 친분을 유지하며 지냈지만, 그들이 파업을 시작했을 때도 쉽게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의 일이어서 자신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고, 정신 차리고 회사 이익에만 집중하라는 임원진들의 말에 순순히 따라야 했다. 그랬던 그가 경찰의 진압 후 선례의 병실에 찾아와 자신도 노동조합에 동참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신이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죠? 혜미가 묻자 동준이 대답한다. “제 일 이니까요.”
동준은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정규직’ 직원이었지만, 정규직이라고 해서 평생 안정적인 일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회사는 비정규직 직원의 아웃소싱과 함께, 정규직 직원의 계약 방법도 연봉계약제로 바꾸겠다고 통보했다. 연봉계약제는 본인 능력에 따라 1년 단위로 회사와 연봉을 계약해야 하는 고용 방식인데, 주로 전문 능력이 필요한 연구, 광고 등의 직종에서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계약 조건에 따라 추가 수당이 연봉 외로 지급되지 않을 수도 있고, 연봉 협상에 실패할 위험이 있을 수 있다.
이제 일자리를 위한 싸움은 그들만의 일이 아니라 동준의 일이 되었고, 동준은 회사의 방침에 반대하며 정규직 직원들을 동원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리고 파업 중인 노조를 찾아가 같이 싸우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동준이 합류하면서 노조는 힘을 얻게 되었고, 법적 조언을 얻거나 구제 명령을 얻어내는 등의 성과도 이룰 수 있었다.
l 긴 싸움의 결과
무력진압으로 아들이 다친 혜미는 싸움을 그만두고 다시 마트 계약직으로 돌아간다. 동준은 수감되었고, 오랜 투쟁 기간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각자의 일거리를 찾아 떠나갔다. 그러나 선희는 아들이 아르바이트 비를 제대로 받지 못해 생겼던 문제를 계기로, 며칠간의 여정을 떠나 흩어진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만나면서 다시 싸움을 계속할 것을 설득한다. “이대로는 너무 억울하잖아.” 아마 선희는 아들이 억울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본인이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끝낸다면 자신의 아들 또한 같은 억울함을 당하며 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선희의 설득에 사람들은 다시 뭉쳤고,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힘껏 드높이며 사람들에게 본인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투쟁을 다시 시작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영화가 끝난 후 짧은 결과를 볼 수 있었는데, 이들은 노조간부의 퇴사를 조건으로 복직할 수 있었다는 반쪽자리 승리를 거뒀다고 했다.
신문 기사를 찾아보니 실제 사건에서의 결과를 알아볼 수 있었다. 512일 동안 계속된 파업은 2008년 11월 13에야 종결되었는데, 협상 결과 해고자 28명 중에서 12명의 노조간부가 퇴사하는 조건으로 16명을 복직시킨 절반의 성공을 이뤘다고 했다. 또한 추가적인 부분도 알 수 있었는데, 바로 파업을 시작했던 2006년 6월 30일의 의미였다. 바로 다음날이었던 7월 1일부터 시행되게 될 ‘비정규직 보호법’을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정한 날짜였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보호법은 ▲비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 금지 ▲기간제 근로자의 총 사용기간을 2년으로 제한 ▲파견근로의 범위·기간과 관련된 보호 등을 담고 있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사용기간을 2년으로 제한’한다는 것이다. '기간제근로자보호법 제4조 제2항'에 따르면 ‘기간제 근로자는 최대 2년까지만 고용 가능하고 2년을 초과할 시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로 간주해야 한다’고 하는데, 많은 사용자들이 2년이 되면 기간제 근로자에게 해고조치를 내리기 때문에 이들의 고용 불안은 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배경들을 찾다 보니, 정작 영화에서는 법·제도의 한계성이나 기업들의 이런 행태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l 타인의 권리를 위해 싸울 권리
영화를 보는 내내 가장 몰입했던 캐릭터는 동준이었다. 당장 그 자신이 비정규직 노동자가 아니더라도 그들의 고충에 공감을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본인의 일이 아닌 싸움에 자신의 밥그릇까리 걸며 동참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던 것도 물론이지만, 결국 ‘내 일’이 된 상황에서 제일 먼저 발 벗고 나서 그들과 연대하는 모습은 충분히 인상 깊었다.
나도 먹여 살릴 가족이 있어 이러는 거라고, 너 또한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 말고 네 일만 신경 쓰라고 동준에게 윽박지르던 최 과장은 우리 사회의 무관심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 ‘우리 사회’라고 크게 볼 필요도 없이, 나 또한 내 일, 내 가족 일에만 몰두해 이기적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나 먹고 살기에도 너무 힘든 세상이라고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며 말이다.
그러나 동준은 반박한다. 그들도 똑같이 먹여 살릴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동준도 최 과장처럼 얼마든지 그들을 외면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타인의 권리를 위해 싸울 권리’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나의 권리를 위해 싸울 권리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다른 사람의 일이 언제 내 일이 될지 모르는 세상에서, 나만의 이익을 지키겠다는 이기심은 결국 부메랑처럼 내게 돌아올지 모르고, 내가 지켜낸 타인의 권리가 다시 나의 권리의 신장으로 되돌아올지 모른다. 동준은 이를 충분히 생각하고 있었다. 엔딩 크레딧을 눈으로 훑으며, 나는 타인에 대한 관심, 그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공감, 그리고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능력이야 말로 이 사회가 좀 더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양식이 아닐까,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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